단순히
떠올리는 가능성에대해서는 보통의 우리는 극도로 자아만을 향한 욕망과 자신의 기준으로 만든 틀안에서 사고할 수 밖에 없으리라.
노스텔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이라했다.
무한히 가능한 우주의 변주속에서 사실, 오로지, 태초에 행위만 있었을 뿐이니, 시간-또는 그 무엇이라도-이란 인간에게는 리듬과 정수가 아니리라. 그러한 세상을 이해하기위해 만든 장치는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모양새를 애써 알아내고자 기준을 만들고, 측정하려 했던 임시 ‘도량형’ 이였던 샘이다.
광속이 진공에서 일정한것은 영원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따라서 행위는 시간보다 가치기준보다, 순수한 아니 우주의 틀에 짜여진 우리의 자아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일으키는것이 중요하리라. 솔직하리라.
견자에게 느껴지는 세상의 이치란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발걸음 뿐 이리라.
파괴와 창조, 죽음과 삶은 같은 말이다. 끝과 시작없는 세상의 흐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솔직한 방향을 찾아 행위를 계속할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존재로 이 우주의 무한한 변주를 연주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부처와 같이 자아와 욕망을 버리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진정한 자유로움이 될 수 있으련만, 그것은 과연 쉽게 도달할수없음 또한 인정하기로하자.
살아있음으로. 살아 움직이기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