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화해하기
얼마전 깨닳은 바가 있다.
어떻게 글로 옮겨볼 수 있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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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 덕분에 거울을 보는것처럼 나 자신을, 엥? 하면서 바라볼 관점이 생긴 일이 있었다.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날 바라보았더니 나는 그동안 삶의 관성으로 -운동량이 정해진- 물체 같았다. 뭐랄까 옳고 그름이나 자유롭거나 틀에 박히거나, 속세의 값어치니 아니면 거룩한 영혼의 위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래 어떤 고난과 노력끝에 알을 깨고 나온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안했는데 뿅!하고 알을 깬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적절한 표현이다. 그친구는 단 한번의 터치인데도 허이퍼리얼리즘으로 나의 모양을 또렷하게 그려주었다. 아! 나는 나를 볼수 있게 되었다. 알렐루야! 그친구는 당췌 영문도 모르겠지 하하! 이런 공짜 잭팟이 가능하다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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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세상에 대한 관점이 무척 노란색으로 따뜻해졌다. 왠지 입가에 미소도 가시지 않는다. 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알고지냈던 그 아주짧은, 그 순간에 말이다. 이렇게 말해줬다.(실제의 언어는 아니다) ‘아름다움은 내 어쩌고저쩌고한 가치관이나 내가 만든 결과물이나, 나 자신의 쓸모보다 아무런 수사가 필요없는 순수한 나 자신에게 있다.’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정말 난 귀인을 만났던거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업드려 절을 하고 싶을 지경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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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가지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다. 하하 죽을 병에 걸렸다는건 아니다. 단지 덧없이 흘러가는 이 소중한 시간을, 생명을, 대부분 컨텐츠를 소비하는데 사용해 왔다. 기왕이면 생산 하는쪽이 되기를 희망 했었는데 말이다. 컨텐츠를 만드는 일이라고 해도 그 깊이가 무엇인지 알고있는 이상, 시간과 돈 사이에 그 깊이라는것을 양념정도로 사용하는 일을 할 뿐이었다. 이래서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난 어쩌면 이 돼도 않던 양념질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깨어나보니 부질 없던거다. 말했던 것처럼 외부의 관점에서 상대평가된 수치 따위가 아닌, 나만의 관점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행복을 찾아야한다. 꾸빼씨 처럼말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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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이 시작이고, 꺼내지않은 산더미 만한 가능성이라는 자산이 분명히 내 등뒤에서 빛나고있던 유딩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읽는다면 재수없겠지만 난 고작 3~4살 부터 미술천재라고 집안과 동네의 자랑이었다. 유치원때 원장님과 선생님은 미대를 가야한다고 애초에 나의 길을 알려주셨댜. 초등학교때는 온갖 교내, 인천시, 전국 어린이 미술대회에 끌려다니느라 스타가 된것같았다. 중학교 1학때는 가슴이 엄청컸던 미술선생님이 제발 미술부에 와줄것을 내 책상앞에 쪼그려앉아 몇일이나 설득했었다. 나는 콧대가 높았다. 건방진 개새끼였다.
어느날 주일에 교리반 친구들과 성당 뒷산에 올라 성당을 그리는 소소한 미술 대회를 열었다. 친구들은 처음부터 내가 그리는 그림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쭐한 나는 3개의 소실점을 사용하여 매우 입체감있는 성당의 풍경을 그려서 재출했다. 수상식때 성당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처다보았다. 당연히 대상은 나라고, 나 자신도 의심하지 않았다.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 그리고 마지막 대상 발표직전, 친하지도 않던 녀석들까지 달려와 내 등을 툭툭 치며 민다.
수녀님이 이어서 말한다
“대상은 우리 성당과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잘 그려준 000 어린이!”
내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들 신부가 된, 그때 주변의 녀석들은 ‘설마.. 상이 더있나?’ ‘광호가 장려상도 못받았다고?’ 하면서 뭔가 쏴하게 장난조차 치지 않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내손에는 아무런 상도 없었다.
인생 최고의 충격이었다. 그 다음주에 몰래 전시되어있던 그 여자애의 그림을 한번 더 봤다. 전형적인 초딩 그림이지만 거기에 그려진 우리 얼굴들은 모두 한사람 한사람 웃고 있었다.
순간 변명의 여지없는 확실한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때마침 중1이었고, 미술부를 구걸하시던 ‘애마부인’ 선생님의 야릇한 가슴골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얐다. 나는 컴퓨터부에 들어가고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사람들의 기대를 또한번 등에 엎고 대학생들과 경쟁하는 코딩 전국대회와 기능사시험에 나가서 처참하게 입상이나, 탈락을했다. ‘중학생이 이정도면 잘했다’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던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난생처음 따뜻한 말씀해 주셨다.
미국으로간 유치원 원장님이 할배가 되서 전화 하셨다. ‘광호야 미대갈꺼지?’
“누구세요 꺼지세요”.
어차피 어정쩡한 내신으론 좋은대학에 가지도 못한다. 미술이라는 앙금때문에라도 미대에 가긴 가야했다. 떨어졌다.
폭주족이되고, 술마시고 담배피고 매일 매일 피투성이가 될정도로 싸움질을 하고 다녔다. 미술이 싫었다. 기교만 있고 마음이 없는 내 그림이 싫었다.
밴드를 하고 음악에 내 인생을 걸었다.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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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런 사소한 일들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회사에서도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내가 싫었다. 그림 따위보다는 코딩이 더 재미있었다. 아트디렉터를 시작할때는 매일매일 이자리가 아닌것같아 불안하고 힘들었다.
불쌍하게 작가나 하고 있는 화가 친구들이 우수웠다. 빙신들. 그림같은게 어떤 의미가 있는거냐. 그냥 똥싸는거아니냐.
6.
040
40대가 되어 누군가의 말처럼 일을 죽도록 할 나이여서 그런가, 일에 묻혀 살았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속에서 그 얄팍한 손재주로 입에 풀칠은 면할수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회사는 어쩌고 왔니?” 였다. 너무 슬펐다. 그래도 그말씀 하기 몇일전에 해주셨던 말은 깊이 내마음속에 새겼다. 내가 미술을 계속 하게 되리라는 -상처없는- 감사한 암시였다.
“광호는 미술이라는 큰 달란트가 있어. 그러니 엄마는 걱정안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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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을 잘 그리거나 못그리거나, 이렇게 조바심을 내고, 후회를 하고, 내 그림이 싫었어도 나는 어머니가 주신 손재주라는 달란트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것이 버거웠으나 세상은 내 그림이나 디자인으로 나를 평가하며 기회와 돈을 주곤했다. 줄곧 이 그림이라는 거대한 못생긴 괴물친구와 싫으면서도 한 침대를 써야했다. 살기위해서말이다. 세상을 괴물의 마법으로 속여서 한편 쉽게도 살아왔다. 저 밑바닥 부터 차오르는 어둠의 마법처럼 내 자만심은 사라지지도 않았건만. 동시에 그런 나를 저주하는 우수운 꼴을 한 것이 바로 나였다. 결국에는 내 안의 자신을 부정하고, 어머니를 모욕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맞다. 어쩌면 졸라 배부른 소리겠지.
8.
화해하기
깨닳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던 괴물이 아니라, 진짜의 나 자신도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그 어린이 그림을 그리던 여학생처럼 사람들에게 영감과 행복을 주고, 나아가 나 자신도 행복하게 만들수 있을지 모른다. 드디어 나는 이 괴물에게 손을 내밀어 보고자 한다. 평생 뒤틀려있던 미술과의 관계를 되돌려 결국 나 자신의 잘못임을 참회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천천히 내 남은 시간동안 어머니께서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내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게다가 요사이 해보니 무척 즐거웠다.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더라.
빌려왔던 따뜻한 노란색 관점 덕분에 세상이 소실점 보다는 웃는 얼굴이 되어가고 있다.
참 다행이다.
그래서 많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니?
미술과 화해하게 해줘서 고맙다. 진심으로. 헤헷
어떻게든 곁에 있을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