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테헤란로에 다녀왔다. 35층. 인간문명이라는 포자에 잠식당한 강남 스카이라인은 청명한 겨울하늘 아래에 창백하게 누워있다. 삐뚤빼뚤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들만이 이것이 멈춰진 풍경화가 아님을 알려주고있다.
안락한 온도와 폭신한 카페트는 창밖의 세상과 서있는 이곳이 정확히 다른곳이라며 단지 관객의 시점으로 태헤란로의 풍경을 감상하게끔 해준다.
안락한 곳.
오래전 테헤란로의 직장을 떠난 이후로 줄곧 저 창밖 차가운 바람속에서 이리저리 해매고 다녔던것 같다. 단정하고 깔끔한 이 안의 감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좀더 자유로워 지고 싶었었다. 영원히 이 안에서 살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생각에 이르자 풍경을 감상하고있는 시점이, 이곳이 아닌 창밖 저멀리 다른곳으로 바뀌었다.
어항 같아 보였다. 그안에 서있는 조그만 내가 간신히 보일따름이다.
회의실 복도에는 엘리스 달튼 브라운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무책임할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다운 풍경화. 섬세한 터치를 보기위해 가까이 다가섰더니 그림안에서 누군가 속삭이는듯 말을 걸어왔다. ‘모든것은 시점의 문제야 바보야’
기왕이면 더 큰 캔버스로, 더 멀리서, 세상의 관점에서.
가까이서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