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의 어느 일요일에 아빠는 반차를 내고 -그녀의 배려로- 일을 할 수 있게되었다.
내 일과의 한부분이 된 어느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끔직한 세상’이라는 말이 무언가 생각의 스위치를 켜게 했다.
끔찍한 세상
즐겨보는 역사에서 반복하여 보고 듣던 그 말. 역사속 시대를 대표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 일본 전국시대, 중세 유럽, 그리고 세월호로 대변되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반복하며 사라지지않는 민중의 외침이었다.
역사를 통해 우리의 선조들은 끔찍한 세상을 후대에 남기지 않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음을 알고 있다. 민중이었을 우리 선조들이 피부로 직접 느껴왔던 그 끔찍한 세상의 부조리들 말이다.
현재의 우리는 그들이 조금씩 개선해온 사회,정치,경제 이 사회 구조라는 토양위에 서있다. 하지만 왜 또다시 ‘끔직한 세상’이란 말인가.
분명 역사를 통해 참혹했다고 알고있던 중세유럽보다 일본 전국시대 보다, 쌍팔년도 전두환의 시절보다(?)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을것 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끔직한 세상’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가.
과거보다 나아졌음에도 배부른 소리한다며 비꼬거나 끔찍한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조상들보다 나약해서도 아니다. 늘 자신을 되돌아 봐야하듯이 사회의 이 부조리함또한 항상 같은 무게감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우리와 대면하는 세상의 끔찍함은 모양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단어로 사용될수 있다는 말이다.
그 모양이 달라진점을 논하기앞서 조상들의 노고로 싸워 없앤 부조리의 결과, 개인 삶의 단계가 재구성 되고 그에 따라 후세가 누리고 있는 행복에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분명히 우리가 얻은 것이 있기때문이다.
인생의 단계
먼저 인생의 단계를 수의 단위로 생각하지 말자, 현 세대에서만 60억개의 인생단계가 있을 것임으로.
오래전 인생의 단계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었다. 지학, 이립, 불혹등의 불친절한 단어 말이다.
또한 14살이면 결혼할 나이, 심지어 50년 인생이라는 말 처럼 모든 면에서 지금 세대의 나이와 목표에 비해 빨랐다. “예전에는 네 나이때 손주를 보았어”, “나이가 30이면 결혼 해야지”하는 압박으로 이어지는 말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차이이다.
어떤가 우리의 현재 대학생들은 과거의 그시절 우리보다 (잘난척 + 망각한 면이 있지만) 비교적 어리다. 조선시대 14살이었던 평균 혼인 나이가 그렇고 불혹인 나, 내 친구들에게 비추어 보아 어떤가? 뜻을 새웠던 역사속 인물들의 시간은 지금의 시간과 맞지 않다. 생물학적 나이에따라 일반화했음으로, 개인과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임에 분명하다. ( 따라서 자괴감이나 이유모를 초조함을 발현시킬 이유가 이미 없다. )
말하고자 하는바는 그들이 ‘빠르다’ 이다. 간단히 말해 어른이 빨리 되어야했다.
험난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논어를 기반으로 아이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가르친것이 지학이니 이립이니 하는 공자의 연표에 기인한 목표, 즉 공자처럼 살아야 행복하다 이다.
따라서 조상들이 단어로 압축하여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행복해라’, 또한 ‘시간이 부족하니 공자가 그랬던것 처럼 빨리빨리 깨닳고 행동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드니까말이야.’
즉, 조상들은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행복함을 배우는 시간, 그것을 적용할 시간이 짧았으며, 그 안타까움을 극복하고자 인생의 단계와 단계별 목표를 비교적 어리게 설정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어린나이에 뜻을 이룬다’는 중요한 모범이며, 가치가 되었던것 같다. 그들이 맞선 ‘끔찍한 세상’은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었음으로.
지금의 그 위협이 다른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 속도에 있다.
인생의 단계와 같이 그 시기와 넓이가 다르다.
굶주림, 창과 칼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이 지금은 경제라는 느리고 완곡한 모습으로 변해있으니 상대적으로 느리며 위협이라고 깨닿기 어렵게 복잡하다.
인생의 단계에서 후세의 우리들에게 그들이 쥐어준 것은 이러한 변화된 위협을 대항할 충분한 준비, 그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복잡하고 완곡한 위협을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어린이, 청소년기라는 시간을 보장되도록 하였다.
동심 (이상)
조상님 부모님의 은혜로, 적어도 일찍이 돈벌이에 나서고 홀로 일어설 시간이 빨랐던 부모님보다, 그들의 짧았던 동심의 기간보다 우리의 동심은 좀더 안락하고 길었다.
나는 언젠가 표현한것 처럼 동심을 사탕병에 비유하며, 달콤한 옛추억을 꺼내 먹으며 지금의 끔직한 세상 속의 나를 위로했다.
부조리함을 없애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후세에 넘겨지게 했던 조상들의 결과물은 그 사탕 병이 아니었을까? 안락하고 행복한 동심을, 더 많고 다양한 달콤함을 넣도록 해준것이 아닐까?
동심이라는 사탕들은 그토록 많은 선조들의 피땀눈물 (원해마니마니) 이었던것 같다.
철없고 무책임하지만 동심이란 부모님께서 경제도 알아서, 정치도 알아서 하며, 외부의 위험과 세상의 추악한면을 최대한 가려주고 산타클로스처럼 아름다운 거짓말속에 내 자아를 만드는, 평생의 뿌리가 될 내 내면의 깊은 즐거움을 찾고 누릴 수 있는 인생의 한 기간이다.
과거의 혼란한 사회 속 어린이들보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더 동심의 기간이 길다.
자아의 잔뿌리가 더 많아지고, 더 넓은 공부와 생각을 해 나갈수 있다. 옛말로 대기만성이 되어 간다.
그를 위해서 부모들은 좀더 오래살고, 더 오래 품어 준다. 아이들의 동심의 기간이 끝나고 세상으로 나왔을때 동심의 세상과 동심 밖의 세상이 최대한 동일한 환경일 수 있도록 가정의 환경, 그리고 넓은의미에서의 가정인 세상을 바꾸고자 수천년을 노력해 왔다.
어쩌면 현재의 우리가 더 많이 끔찍함을 바로 잡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럴 수록 우리의 아이들은 인생의 기간중 동심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다. 아이들의 아이들은 더욱더… 나아가 인생의 전체가 동심과 동심밖세상을 구분할 필요 없이 동일 하게 아름답고 즐겁기만한 세상이 될 것 이다.
우리는 세상의 끔찍함을 이야기 한다.
단단하게 딛고 있는 우리 내면의 동심과 비교하며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말이다.
세대를 관통하여 동일게 ‘끔찍하다’고 세상을 말하는것은 동시에 우리의 동심이 그만큼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꾸는 이상이 더 커지고 그만큼 우리의 기반도 더 커져왔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이 만들어준 -지구처럼 든든한- 우리의 동심, 이상 ( 물리학과 심리학에서 동시에 사용 할 수 있는 ‘중력’ 이라는 단어도 동의어로 정의 할 수 있겠다. )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귀한 유산이다.
감사한 선물이다.
나는 아직도 동심을 추억하며, 그리워 한다.
세상을 보던 나의 그 천진난만한 웃음과 기쁨들이 너무나 그리우며 아름답다.
데자뷰처럼 그런감정이 솓아나는 대상이나 사고들이 ‘영감’이라는 단어가 되고
그 ‘영감’ , ‘동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쫒아가는 행동으로서 무언가 그림을 그리거나 코딩을 하거나, 음악을 만들게 되는 매커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면에 각인된 그 즐거움은 평생의 나를 이끌어 주는 힘이 된다.
백남준이 말한 노스텔지어가 바로 이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들에게, 나의 딸에게
그들의 인생을 끌어줄 힘과 세상에 나갔을때 지금과 다르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나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부모님의 부모님들이 그러했듯 나 또한 세상의 부조리, 나자신의 부조리를 밝혀내고, 바꾸어 놓아야겠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끔찍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줄수는없다. (어떤것인지 모르니까) 다만 할 수있는 일은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꿈꿀수있는 동심의 시간. 또한 부조리함과 싸워왔던 조상님들의 옛날이야기를 해주며,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지 가치있는 삶이란 모두함께 다음으로 넘겨줄 땅을 만들어가는 일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뿐인것 같다.
즐거운 동심속의 일주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천요일, 해요일…
동심의 일주일이 더 길어지고, 그만큼 아이들이 나이먹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아니 그 세상을 조금이나마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사명이다.
동심은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