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9시30분, 이른 퇴근에 감개가 무량하다. 다들 오랜만에 집에 가서 게임도하고 빨래도 할수있다며 좋아한다. 늦었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말에는 대답이 시원치 않다.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어 일주일간 갇혀있던 차안의 쾨쾨한 냄새를 빼냈더니, 그사이로 설레이는 흙냄새가 한웅큼 들어왔다.
운전하는 내내 창문을 모두열고, 신선한 바람으로 온몸을 행구어냈다. 남인천 톨게이트를 지나면 가장 공기가 좋은 구간이 나온다. 하루종일 이슬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더욱 흙냄새가 묵직해졌다.
인류가 이렇게 오래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가 이렇게 흙냄새를 맡아내는 민감한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지, 냄새에 둔했던 우리 조상은 모두 전멸한거다. 우리는 공기 입자 1조 개 중에 흙냄새 성분인 지오스민 분자가 3~4개만 있어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고한다. 이렇게 물을 찾아 마실 수 있는 능력으로 자연에서 열등한 인류는 이렇게 살아 낼수 있었던거다. 무게 중심만 슬쩍 움직여 걷는 최고 효율의 이동연비와 시너지를 내어 그 어떤 동물보다 멀리서 물에 젖은 흙냄새를 쫒아 갈증을 이겨냈던거다.
이렇게 봄비에 젖은 흙냄새가 그립고 설래이는, 좋은 기분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 오래전 조상들에게서 부터 느껴졌을 ‘물을 찾았다.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기분. 모두 안도하며 행복해 했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우리의 감각에 각인되어 이어져내려오는 것일꺼다.
조금 걸어볼 생각으로 멀리 차를 대고 느긋한 걸음에는 그리운 흙냄새와 파란새싹들의 기다란 그림자, 나즈막히 피어오르는 발자국소리, 그리고 왜인지 반가운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모두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으로 오랬동안 기억하고 싶어졌다. 더욱 천천히 걸으며 이 모든것을, 어린시절 처럼 섬세한 감정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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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다듬어보고 싶어 올리지못한사이에 몇일이 훅 지나갔다. 글을 올리려고 다시 읽어보자니, 이미 반팔에 끈적한 여름밤이 되어버렸다.
글을 쓰던 중이었을 뿐인데 봄은 더듬어 기억해야할만큼 지나쳐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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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교황님 소식을 들었을때 옆자리 동료들 몰래 조용히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렸다. 하도 신자 아닌척 나잘난척 모태신앙을 부정하며 살았던지, 미안했다. 죄의식 같은것이 느껴지고 왜인지 그럴것 같지 않았는데 먹먹하고 슬펐다. 몇시간 후 사무실 친구들이 다들 뉴스를 보게 되었는지 시끌벅쩍 떠든다. 나에게 교황은 죽어야 바뀌냐 어쩌구저쩌구 가쉽거리로서 신나게 물어보고 웃고 떠든다. 조용히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도 대답을 안하고 싶어 안하는데도 쫑알쫑알 물어본다. 화도나지않고 귀찮기만했다. 그래 눈치없는 새끼들아 뉴스한켠에 텍스트로 적힌 한사람의 죽음일 뿐이다. 하지만 이순간이 아니면 언제 기억하고 언제 슬퍼할수있을까 오롯이 그의 영면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또 얼마나있겠냔말이다.
재가되고 흙이 된다. 지구는 닫힌계 이기때문에 죽은이는 흩어져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다시, 계속 무언가로 다른 모양으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뿐이랴 우리의 들숨과 날숨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가 산소와 질소등으 모습으로 우리안에 들어와 내가 되기도 하는거다.
그러한 연결과 연결속에서, 흙냄새의 그것 처럼 우리에게 부여된 섬세함으로, 흙과 공기로 돌아간 사람들의 설레이고 그리운 향기 또한 느끼며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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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피곤하다. 잠을 많이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