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iet Tears
Oil pastel on Paper, 21 x 29.7 cm
#oilpastel #art_daily
오늘은 새벽 5시 히히
…
쓰러저서 자다가 1시에 일어났다.
모두 출근을 해 있는데, 아마도 크레파스랑 붓이 널부러저있는 내자리를 보고 일부러 깨우지 않았나보다.
어제는 도저히 안그려져서 중간에 찢어버릴까하다가 어차피 망한거 좆되는 마음으로 새 붓에다가 오일만 발라 다 뭉게고 톤만 잡고 자기로했다. 유화였다면, 어두운톤으로 시작해 3~2번정도의 명도까지 쌓아 놓고 각각의 부분을 다시 쌓아서 하이라이트 까지 가는걸 몇번이고 해볼수도 있겠지만, 오일파스텔의 경우 색을 쌓는게 각각 파스텔의 경도에 따라, 또 혼합력(?)에 따라 너무 팍튀거나 깔아논 톤을 벗겨내며 그려지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붓에 오일을 발라 파스텔을 녹여 묻힌것을 살살 문질러 그리게 되는건데 그래봐야 배타적인 컬러가 나오게 된다. 요런 부분이 경험과 공부가 필요한 거고, 눈에 보이는 저 맘에 안드는 부분을 어떻게 해야하나. 기껏그린 묘사를 날리고 톤을 살리냐 혹은 튀어도 다시 그릴 시간이 없으니 묘사로 계속 파서 후린다의 갈림길. 선택의 연속이 되는거다.
결과적으로 지난번은 돼도않는 묘사, 즉 후자를 선택했고, 이번은 전자를 선택했다.
해보니, 압도적으로 톤이 중요한것 같다. 묘사는 사소한일에 목숨거는 욕심쟁이 소인배들이나 하는거다 ㅎㅎ
‘어떻게 되겠지’의 영역이 있고, 지켜야할 ‘작업 프로세스’가 있다는걸 다시 인정한다. 방황할 수십시간을 미리 방지해주는걸 알면서도, 매번 싸우고 외면하는 그 프로세스말이다. 완벽히 이해할수 없어도 확율적으로 그렇다면 받아들이는거다.
자유와 프로세스, 모든 세상만사가 똑같다. 잔잔한 수조관이든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든 둘다 넘어가 봐야 아는거다.
온갖 새우나 해파리 같은 벌레들때문에 수영이 무서웠다면, 시시한 수영장에서 해보자. 꾀 재미있었다면, 또 그 바다의 광활함을 느끼고 싶다면 수영장에서 배운걸 바다에서 해보는거다. 어라? 더 쉽잖아? 더 멀리 나가보는거다. 바다 한가운데, 형들이 점으로 보일때 까지 수영해보자 .
이번엔 우주에 있는것 처럼 밤에 수영해 보는거다. 바다가 나를 등뒤에서 감싸 안으며 품고있고,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빼곡하던 별들은 또한 깊고 웅장한 소리와 함께 몇억광년 만큼을 달려와 바다와 나를 똑같이 껴안아 주던 그 느낌. 엄마의 자궁속으로 돌아간것 같았던 그 끝없이 포근한 여름밤 처럼. 아늑한 그리움과 죽음의 경계에 까지 가봐야 우리는 경계 너머를 볼수 있다.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나를 조여오는 안전벨트는 매번은 아닐지라도 해도 이럴때, 내 안에서 불타는 나의 욕망이 피할 수 없이 원할때에는 주저 없이 풀어 버리자. 삶의 모든것은 포근한 침실이나 거실에 틀어져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자신을 삶을 관조만하면서 자빠져있지 말자는 이야기다. 대단한건 아니다. 작은 면, 경계, 보색에 채도높은 작은 점이 들어가면 좋겠는데 전체가 흔들릴걸 안다. 그림 전체의 톤을 다시 덧칠해야 하더라도 주저없이 하자. 삶의 어떤것들은 타협하지 말자. 아는척 깝치지 말자. 말도 말이지만 지금 그을 그 선이 어떤건지 넌 모른다는걸 인정하자. 면의 톤이 뭔지 넌 절대 모른다는걸 그걸 알자. 지금의 나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쌓아보고 넘어가 보자. 그러면 모른다는걸 알게된다. 당췌 알수는 없어도 모른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이 씨앗이 될테니 걱정하지 마라.
오로지 시간과 선택, 그리고 모든것의 점화 플러그 ‘욕망’ 뿐이다.
원하는것과 공포의 경계에서 그것을 뛰어넘도록 해주는것은 좆되면 어때? 하는 마음이다. 겁내지마라 안죽는다. 파충류의 뇌가 너를 안죽게 해줄테니까. 자신을 믿고 알을 깨고 나와라. 넌 생각 보다 훨씬 잘 해낼수있다. 반대로 지금의 너는 생각 보다 훨씬 도전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다. 앞으로의 모든 너의 시간속에 각인해야할 마법의 문장이다.
“씨발 좆되던지 말던지”
이것이 무엇이든 좆되는 마음으로 해야한다는 나의 이론이다. 푸핫
p.s. 운전이나 음주에만은 더 이상 이 이론을 사용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