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다보니 홈페이지 관리를 조금 해봤다.
모두다 예전이야기 뿐이라 새글을 쓰려고 열었다가 문뜩 장편SF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역시 모든것의 근본은 소설이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고 했던가. 제길 나는 역시 쇼츠세대인가보다.
사실 소설을 쓰고싶다는 생각은 대충 30년전부터 해왔다. 비밀스런 노트를 갖고 다니며 ‘랭보’처럼 초년의 대 시인, 작가의 꿈을 꾸었었다.
사막을 여행하는 어떤 여행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도를 무척 동경하였으나 무언가 포화 상태였기때문에 그리고 ‘랭보’처럼 이라고 언급한 이유로 사막을 가고 싶었다.
참고로 떠올려 보면 인도에대한 어그로는 류시화 시인이 대표적이었고, 페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시티 오브 조이’같은 영화가 있었다.
지금의 인류가 모든 기술을 인도인들의 유튜브에서 배우듯, 그 당시의 정서는 인도에대한 <사실 오리엔탈리즘으로 조금은 엉키고 과장된> 것을 우리는 동경하며 정서적 도피처나 정신의 근본처럼 생각했었다. 나로선 90년대 이전의 문화를 배워왔던 터였다.
아무튼, ‘잉글리쉬 페이션트’같은 그런 배경. 사막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는데, 시간이 흘러 언젠가 그 소설이 적힌 노트를 다시 찾아 읽어본적이 있다. 거의 대부분 시각적 묘사 밖에는 없었다. 이야기는 없고 묘사만 잔뜩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상상했던 감정과 풍경을 담으려고 무척 애썼던것 같다. 주인공이 아침에 일어나 짜이를 마시는 그 5분간을 몇페이지동안 서술했다. ‘사막에서 무슨 짜이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더 흐른 지금 gpt에 물어보니 사막국가에서도 다들 짜이를 마신다고 한다. 호오 그런 촉이있었어?
18살의 나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아직도 글을 잘 쓰지 못한다.
하지만 1년후에 네가 시작한 진짜 여행이야기는 쓸 수 있을것 같다.
미술학원에서 선생님의 사소한 지적에 4B연필을 모두 분지르고, 이젤까지 바닥에 내리치고는 그대로 나와 해버렸다.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친구들이 얼어붙어버린 그 순간의 장면은 변색된 사진처럼 묘한 감정과 함께 남아있다.
통쾌한 일탈을 알게된 순간이었다.
처음엔 괜한 할머니를 꼬드겨 함께 강화도에 가서 3~4일을 보냈다. 정말 이웃사촌이었던 슈퍼집에서 탱자탱자 이어폰을 끼고 그집 옥상에 누워 하루종일 있었다. 등이배기면 논두렁길이나 아무 산길을 쏘다녔다. 쫄랑이랑 다녔던 길, 동네형들과 경운기를 타고 달리던 그런 길 말이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물론 어머니께서도 아무말을 하지 않으셨다. 몇일을 아무 생각 없이 쉬고오라는 나만 모르는 모든 사람들의 배려가 있었던가보다. 슈퍼에서 훔쳐 피던 담배도 다 떨어지고 카세트의 배터리도 떨어져 집에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나와 함께 동네 어귀의 바스러질듯한 양철 지붕이 얹혀있는 반은 무너져있던 방앗간이 안쓰러워 보이던 길가에서 버스를 타고 읍네로, 또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창밖을 보며 지금은 어떤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인생의 중압감과 나의 존재감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고자 많은 생각을 했던것 같다.
이렇게 휙 사라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처음의 것은 사진찍듯이 이유가 기억나지만 그다음은 이유같은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포항도, 부산도, 태백산에도, 목표며, 광주 온갖곳을 떠돌았다.
대체로 계획은 커녕 돈도 한푼도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오자마자 고모댁에 들른적도 있다. 5만원만 빌려달라고 여행을 하고 올테니.
명절때에조차 인사를 제대로한적 없던 내가 대뜸 고모들에게 찾아갔던거다. 고모들은 장손이 내민손에 그저 반갑고 기뻐했다.
돈이 떨어지면 공사판아저씨들과 대뜸 친해져서 밥도 얻어먹고, 길거리 양아치들과 어울려 지내며 끼니를 때웠다. 그런 기가막히고 뻔뻔한 사회생활이 가능하다니 그때도 지금도 인간의 생존본능은 위대하다고 느낀다. 골목 골목의 사람들의 삶이 나는 크게 잘못되거나 불행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위로를 해 주었다. 특히나 극도의 배고픔에 의해 나를 막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가오 같은것이 사라졌을때, 사람들의 온정이 내 배를 그리고 마음을 채워 주었던 기억들은 특별하다. ‘저기 여행하는 학생인데요 너무 배가고파서…’ 그정도의 미약한 노력이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것이 가능했다.
월출산이었다.
저녁늦게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산하고 있을때, 캔버스화를 신고 무슨 산인지도 모르고 올랐다가 구름다리에, 깍아지른 바위에, 거기다가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는 그림자. 갑자기 훅하고 차가운 공기가 몸과 마음을 모두 얼어 붇게 했다. 처음 마주한 도시촌놈에게는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공포였다. 하산할때의 구름다리는 몇배나 무서워 정말 기어서 건넜다. 거의 깜깜해진 길을 더듬어 하산했을때 주변의 인적도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아서 이 미친 계획없는 여행벽은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동서남북도 모른채 한참을 걸었는데, 시티100 오토바이가 저멀리서 나에게 향해왔다. 반갑기도 했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바짝 쫄았었다. 라이터를 오른손주먹에 쥐고 생존의 싸움을 하는구나 준비했을때, 덜덜덜 오토바이 엔진소리 보다 더 어눌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큰일 날뻔했네 내가 못봤으면 어쩔려고’
오토바이 뒤에 타서 처음본 흙냄새 나는 아저씨를 껴앉고 한참을 달렸다.
‘어디? 읍네로 가야겠네? 어이구 어떻하려고 오밤중에 산을 다녀…’
아저씨는 민박집에 쓰라며 5000원을 주셨다. 허리를 크게 굽혀 인사를 드렸다.
여느 민박집과 비슷하게도 벽이 매우 얇아 옆방사람의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 논두렁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 방향을 알수없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해서 인지 그대로 잠이 든것 같았다.
꿈 속에서 류시화 시인의 글처럼 지붕이없는 숙소였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별을 볼 수는 없었지만 거대한 우주와 나 사이에 어색한 이불하나만 있는것 같았다. 크고 멀고 웅장했지만 세상은 아까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뒤척이시던 옆방아저씨가 수돗가에서 먼저 씻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고양이 세수를 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아무버스나 타고, 창밖을 구경하다가 대나무가 무척많던 어느 마을에서 내렸다.
낮은 경사에도 자연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밀집시켜놓은 듯한 아담한 대나무 마을이었다.
마을을 한바퀴 돌았을 뿐인데 배가 고팠다. 꼬깃꼬깃 접었던 만원짜리를 펴며 먹을곳을 찾았는데 내릴때는 안보이던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의외로 설렁탕집이 있었다. 너무 흔한 외형이어서 기억하기에도 쉬운 알루미늄철판의 벽, 드르륵 열수있는 문에는 뻔한색상에 뻔한 글씨체로 설렁탕이라고 써있었던것 같다.
따뜻한 마을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왠일인지 마을 아저씨들이 잔뜩 모여 설렁탕을 드시고 있었다.
티비를 보시느라 어색하게 들어오는 젊은친구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모두 티비에 몰두하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설렁탕이 나왔고 정신없이 코를 박고 먹고있는데, 식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는것이 아닌가?
무슨일인지 그들의 시선이 닿는곳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김대중대통령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식당안의 아저씨들이 다 김대중 대통령이랑 똑같이 생겼다?
‘와따~ 역시 우리 슨상님 이랑께!!’ 사람들은 모두 마을의 경사가 난것마냥 함께 기뻐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의미를 뒤늦게 알게되었던 나로서도 환한 이 풍경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날이 역사적인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날이다.
gpt로 찾아보니 1997년 12월 18일이 당선이 된 날이고, 아마도 그 다음날 당선 소감 연설을 보면서 또다시 환희를 나누고 계셨던것같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1997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잠깐, 군대에 있었을땐데? 대학교1학년이나 재수할때의 기억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휴가때에 무턱대고 또 일탈을 하고 있었나보다.
하여간 잊지못할 행복한 얼굴들이었다.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고 있는데, 글을 쓰는중에 계엄선포. 글을 마저 다 쓰니 계엄해제가 되었다. 기가막힌 역사의 순간이다.
오늘은 2024년 12월 4일 이다.